여행 발로 쓰는 파리 여행기 3 - 죽음의 태양 2013/08/13 17:06 by 꼬북왕

 박웅현은 <책은 도끼다>에서 불문학자 김화영의 글을 설명하던 중 이런 글을 썼다.

 "사람들의 사고를 형성하는 데 날씨는 아주 큰 역할을 합니다. (중략) 흔히 지중해성 기후라고 하는데, 내리쬐는 햇살 덕에 기온은 높지만, 습도가 낮아 굉장히 쾌적합니다. 저는 일 년에 한 번씩 칸 국제광고제 때문에 남프랑스의 도시인 칸으로 가는데요, 햇볕은 뜨겁지만 그늘로 들어가면 아주 서늘하더군요. 더운 날씨지만 전혀 짜증스럽지 않죠. 그런 환경에서 살다보니 그곳 사람들은 아등바등할 일이 없습니다. (후략)"




 내가 파리 여행을 하던 기간에 한국은 장마철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폭우가 쏟아졌다. 습식 사우나 같은 대기를 뚫고 나가는 일엔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다. 심지어 한 지인은 "파리를 가는 것은 안 부러운데, 젖은 비닐봉지 같은 한국을 뜬다는 게 부럽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실제로 파리의 날씨는 청명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이 쾌적한 날씨가 얼마만이던가. 낮인지 밤인지 구별조차 안되는 안산에 있었던 것이 고작 이틀 전이었다. 간만에 맞이하는 강한 햇빛이 이리도 반가울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런데 도착한 첫날엔 분명 햇빛이 반가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햇빛이 '죽음의 태양'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맑은 파리의 날씨를 좋아했지만 민박집 사장님은 걱정어린 눈빛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한 달째 가뭄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뉴스에서는 런던에서 폭염으로 2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습도가 낮아서 그늘 밑으로 들어가면 시원해지긴 하지만, 햇빛 자체가 너무 강해서 조금만 걸어도 몸이 금세 퍼지기 일쑤였다. 얼마 전 묵었던 여자 게스트는 생루이섬을 관광하던 중 열사병으로 쓰러진 적도 있다고 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라고 생각했지만 둘째날 베르사유 궁전에서 지옥을 맛봤다. 만만하게만 봤던 그 태양은 '죽음의 태양'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 답게 입장객이 어마어마하게 많기 때문에 한 시간 반 정도 줄을 서야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줄을 서는 곳엔 그늘도, 천막도 없다. 햇빛에 노릇노릇하게 달궈진 대리석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선크림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을 오롯이 견뎌야 한다. 일행이라도 있으면 한 사람씩 번갈아가며 줄을 서면 되지만, 나처럼 혼자 온 여행객들은 그 긴 시간을 참고 또 참아야 한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분명 전생에 선비가 아니었을까. 이런 말도 안되는 더위 속에서 어떻게 웃을 수 있는 걸까.

 박웅현은 프랑스의 날씨가 덥지만 짜증스럽지 않다고 했지만, 내가 느끼기엔 덥고 짜증나는 날씨였다. 습도가 없다뿐이지, 내리쬐는 햇빛이 불러오는 짜증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나라는 햇빛을 피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반겨주지만, 프랑스는 냉방 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는 건물을 찾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길들여진 비루한 내 몸뚱이를 탓하는 게 마땅한 일이지만, 그 당시엔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정말 죽을 것 같았으니까.

 궁전 관람을 포기하고 정원으로 통하는 옆길로 향했다. 햇빛은 그대로였지만 정원은 아름다웠다. 나무는 자로 잰 듯이 정교하게 커팅되어 있었고 형형색색의 꽃들은 난잡하지 않게 조화를 이루며 심어져 있었다. 아래로 펼쳐진 호수와 잔디밭은 눈을 트이게 할 정도로 광활하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들였다.

                                                        발로 찍은 베르사유 정원의 모습

 더 놀란 것은 이런 정원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내부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이 모습을 드러내는 갖가지 정원의 모습과 스케일에 두 번 놀랐다. 하루를 꼬박 돌아도 베르사유를 제대로 못 즐긴다는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궁전을 제외하고 정원과 트리아농만 둘러보는 데도 반나절이 넘게 걸렸다. 


                                                              

 정원과 트리아농을 둘러보고 궁전으로 이동했다. 오전보다 사람이 많이 줄어 있었다. (줄었음에도 40분 정도 기다린 후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궁전 역시 호화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압도적인 크기는 물론이거니와 방마다 전시된 고가의 가구들과 정교한 그림들이 가득했다. 특히 천장에 수놓아진 갖가지 그림들은 베르사유 궁전이 왜 유명한 지 설명해주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작품이나 궁전 내부를 둘러보기가 녹록치 않았다. 북적이고 소란스럽고 한국인이 많은 궁전 내부가 신축아파트 모델하우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성수기 오브 성수기는 역시 남달랐다.


 정원과 트리아농, 궁전까지 보고나니 어느덧 시간이 5시 30분이 되었다. 정원에 있는 나무 그늘에서 약간의 낮잠을 자긴 했지만 나름 발바닥에 땀이 나게 돌아봤음에도 가지 못한 곳이 있을 정도로 넓고 광대했다. 날씨가 조금만 선선했다면 좀 더 밝은 표정으로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베르사유를 순회한 내 몸뚱이는 물수건이 되어 있었다.

 RER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심심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다. 백여 년전에 지어놓은 궁전 하나로 해마다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리는 프랑스가 부럽다, 왜 RER은 에어컨을 안 틀어줄까, 아까 먹은 레몬 아이스크림 또 먹고싶다 등등의 생각을 하다가 궁전 내부를 다시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도 안되는 크기의 궁전이다. 근데 저 건물과 정원을 19세기의 기술력으로 만드는 동안 얼마만큼의 노동력이 필요했을까?

 루이 14세가 베르사유를 지은 건, 딱히 명분이 있어서가 아니다. 재무장관 푸케의 보르 비 콩트 성을 보고 질투심에 밤잠을 설치다가, 유사 이래 최대의 궁전을 만들어야겠다는 치기어린 생각을 한 것이 궁전 건축의 시작점이다. 여러 명의 예술가들이 참여해 50여년 간 막대한 비용을 들여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습지를 숲으로 만들고, 분수를 위해서 강줄기를 바꾸는 등의 '자연파괴적' 행위까지 자행됐다. 현 시점의 관광객들이야 일정 금액을 내고 관광지로서의 베르사유 궁전을 즐기지만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눈에 이 궁전이 아름답게만 보였을까? 어찌보면 그 궁전은 멍청한 리더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불러온 악마의 건물이나 다름없다. 

 그저 시키는 대로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대상은 자비없이 내리꽂는 '죽음의 태양'이 아니라 '죽음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4대강 보처럼 바보 건축물은 아니니까 후손들은 관광수익으로 덕을 보고 있다는 게 그나마 정당화될 수 있는 요소라면 요소다. 그렇다면 4대강에 22조를 쏟아 붓고도 본전은 커녕 앞으로도 돈이 줄줄 새어 나가야 할 상황을 만든 MB는 루이 14세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라도 되는 건가. 비교하기가 애매하긴 하지만 둘 다 정상적인 통치자는 아니었음엔 틀림없다.



 이런 저런 뻘생각을 하다보니 숙소 근처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도 태양은 작열했다. 프랑스는 썸머타임을 적용하고도 밤 10시가 넘어야 해가 진다. 아침에 나갈 때만 해도 반가웠던 태양이 하루만에 지겨웠다. '더운 날씨지만 짜증은 나지 않는다' 던 파리의 날씨가 짜증이 났고, 빨리 해가 져서 야경이나 봤으면 싶었다. 난 죽었다 깨어나도 우아한 파리지앵으로 살지 못할 것 같다.

 뒷이야기

 혼자 간 여행객이라면 베르사유에서 밥 먹기가 애매할 것이다. 당신에게 추천한다. 베르사유역 앞 맥도날드에서 파는 로열 디럭스 버거. 프랜차이즈 햄버거를 먹고 놀라보기는 처음이었다. 세트메뉴 가격이 약 7유로.

 

덧글

  • 토나이투 2013/08/14 00:42 # 답글

    마치 건축 평론가의 여행기를 듣는듯한 좋은 글이네요 ㅎㅎ
    잘 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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