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이 총량의 법칙: 사회 혹은 조직이나 특정 장소에 일정량의 돌아이들이 존재함을 설명하는 법칙. 과학적 실험을 통해 입증된 바는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귀납적 추론으로 이 법칙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 일종의 불문율.
* 돌아이 : 1) 정상인의 범주에 어긋나는 똘기 가득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
2)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무례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을 일컫는 말.
* 주의 : 사전에 이렇게 안나와 있음.
정규 교육과정을 거친 대한민국 국민 모두라면 무의식 중에 체감하고 있을 '돌아이 총량의 법칙'. 사람마다 주변에 미친놈, 혹은 돌아이 하나씩은 알고 있기 마련이다. (물론 본인이 그 돌아이일 수도 있다.) 이 법칙엔 예외가 드물다. 가족같은 분위기라고만 느꼈던 회사에서도 종잡을 수 없는 상사의 꼰대질은 있기 마련이며, 핏줄이나 다름없다고 믿었던 친구의 돌발행동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단언컨대, 가족같은 분위기와 가 '족'같은 분위기는 한 끗 차이다.
낯선 장소에서도 마찬가지다. 처음 간 술집에서 주정뱅이 돌아이들에게 난데없는 시비를 당하거나, 어두운 밤길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물론 이 법칙이 한반도의 테두리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숨을 쉴 때마다 이산화탄소보다 우아한 기품이 더 많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던 파리지앵의 도시 '파리'도 그 법칙을 비껴나지 않는 것 같았다.
돌아이를 처음 목격한 것은 파리에 도착한 첫날이었다. 숙소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야경투어를 떠나기 위해 나와 사장님, 여자 게스트 11명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남루한 행색의 프랑스 청년이 병콜라를 빨아 제끼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어정쩡하게 걸어오던 그는 우리와 일행이었던 여자분 앞에 서서 감탄사를 남발했다.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므흣한 눈빛과 함께 노골적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한국이었다면 성희롱죄로 은팔찌를 찰 정도의 행위였다. 포카리스웨트 CF를 떠오르게 하는 샤랄라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주인 형님은 화가 많이 난 것처럼 보였지만, 큰 싸움에 휘말렸다가 고객 전체에 피해를 입힐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선뜻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의 인생에는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나는 어쩌면 그 순간이 그 중 한 번의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멋지게 프랑스 청년을 제압한 훈남 여행객 코스프레에 적합한 상황이 아닌가. 앞으로 8일간이나 머물 숙소의 레전드로 남을 수 있는 멍석이 깔려 있었다. 재빠르게 머리 속으로 손익계산서를 작성했다. 그 프랑스 돌아이는 키가 165 정도로 작았고, 몸도 호리호리했다. 민소매 티셔츠와 짧은 반바지를 입은 것을 보니 딱히 무기를 소지한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키 174에 덩치가 있는 편이다.) 하지만 병 중의 병 콜라병이 돌아이의 손에 얹혀져 있었다. 저걸로 맞으면 전치 4주는 족히 나올 것 같았다. 의료보험도 적용되지 않는 프랑스의 병실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할 나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지하철이 역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지하철에 올라탔고, 그 돌아이는 문이 닫힐 때까지 감탄사를 남발하며 노골적인 눈빛을 보냈다. 시야에서 그 돌아이가 멀어졌다. 일행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류 멸망을 눈 앞에 둔 사람들이 설국열차에 올라탈 때의 기분이 이랬을까.

발로 찍은 사크레쾨르 성당 사진
첫번째 돌아이를 제껴내는데 성공(?)한 후 anvers역에 도착했다. 출구로 나와서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몽마르뜨 언덕과 사크레쾨르 성당이 나온다. 몽마르뜨 언덕은 파리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곳이다. 언덕을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다. 케이블카와 계단 오르기. 나비고 카드 소지자라면 무료로 케이블카를 이용할 수 있고, 카드가 없다면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탈 수 있다. 돈이 아깝다고? 튼튼한 두 다리로 묵묵히 108계단을 올라가면 된다. (진짜 108개가 맞는 지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언덕에서 바라보는 파리의 야경은 끝내준다고 하기엔 뭣하고 그냥 어느 정도 보기에 좋다.
몽마르뜨의 밤은 소란스럽다. 관광명소라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몽마르뜨 언덕에서는 불규칙적으로 거리 공연이 펼쳐진다. 이날엔 공연이 없었지만,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엔 미국 공연단들의 불쇼가 진행되고 있었다. 불덩이에 줄을 달아 요요처럼 자유자재로 묘기를 펼치는 모습을 전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이 미소를 머금고 지켜본다. 국적에 상관없이 공연을 즐기고, 관객들이 스스로 관람료를 정해서 주면 된다. 돈이 없다고? 물론 안 줘도 된다. 수많은 대화소리가 잦아들고 공연에 오롯이 집중했던 몽마르뜨 언덕은 파리 여행을 하면서 유일하게 '위 아 더 월드'를 느끼게 해준 장소였다.
하지만 몽마르뜨는 악명도 높다. 그 이름도 유명한 '실팔찌단'이라는 돌아이 집단 때문이다. 몽마르뜨를 거닐 때, 팔을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켰다가는 갑작스런 습격을 받게 된다. 피습이 아니라 돈을 털린다. 이들은 실로 팔찌를 만들어 관광객의 팔에 걸어준 뒤 돈을 요구한다. 돈을 안주면 주변에서 일당들이 몰려온다. 요구하는 금액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혼자있는 여성이 주로 타겟이라고 한다. 일행 중 한 여자분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열에서 이탈했다가 실팔찌단의 기습을 당할 뻔 했으나 다른 한국인 관광객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 외에도 사람들을 헤집고 다니며 술주정을 부리는 프랑스 청년들이나, 뒤에서 갑자기 에펠탑 열쇠고리를 내밀며 호객행위를 하는 기묘한 세일즈도 횡행한다. 애석하게도 관광지라고 돌아이 총량의 법칙을 비켜가진 않는다.
파리 돌아이 퍼레이드의 화룡점정은 내부의 적이 찍어줬다. 여행 5일차, 일정을 마치고 게스트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그날은 게스트 몇 명이 물갈이된 날이기도 했다. 도란도란 앉아 술자리를 기울이던 중, 처음 들어온 33세 게스트분이 꽐라 모드로 돌입하기 시작했다. 여자 게스트에게 무례한 농담을 하기도 하고, 내게는 같은 안산 출신이라며 선배 대접을 해달라, 깍듯이 대하라는 등의 돌아이 10단 콤보를 날려대고 있었다. 평온한 술자리 속에 난입한 돌아이 하나 때문에 순식간에 분위기는 싸해졌고, 나도 뼈있는 농담으로 받아치며 자리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나간 뒤, 모두가 잠든 후에야 들어오는 패턴을 반복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활달했던 꽐라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꽐라가 되었던 그날 밤, 그는 매트리스에 어마어마한 양의 오바이트를 했고, 그 소문이 같은 방 게스트들에 의해 쫙 퍼져 있었다. 내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지하철 돌아이와의 한판승부로 쟁취할까말까 고민했던 숙소의 레전드 자리를 그 남자는 한 번의 오바이트로 차지했다. 뭐 부럽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애석하다. 그 먼 프랑스까지 가서 한국의 돌아이를 만났으니 말이다.
뒷이야기
파리 지하철엔 프랑스판 예수쟁이들도 있다. 한 손에 책을 들고 사람들에게 잠언을 설파한다. 여기서 잠언은 잠이 오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큰둥하게 쳐다보거나 무시해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끝까지 자기 할 말을 한 후에 다음 정거장에서 하차한다. 지구는 둥그니까 비슷비슷한 사람들도 있나보다. 정말 "위 아 더 월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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